카사노바에 대한 설명

에스파냐계의 이탈리아 문학가. 모험가. 엽색가.
별칭 : 생갈트의 기사
국적 : 이탈리아
활동분야 : 문학, 모험
출생지 : 이탈리아 베네치아

카사노바는 어쩌다 전설적인 바람둥이가 됐나.

▲사실 역사 속에서 카사노바 같은 바람둥이는 많았다. 모차르트나 볼테르도 대단한 바람둥이였다. 하지만 카사노바는 기록을 했다는 점에서 다른 이들과 큰 차이가 있다. 자서전에는 100명이 넘는 여인들과의 사랑이 세세하게 기록돼 있다. 모녀·자매도 있고 수녀도 있다. 18세기 풍속사를 연구하는 데도 중요한 자료다.

‘지아코모 지롤라모 카사노바 슈발리에 드생갈’이라는 긴 이름을 가진 인물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단편적이다. 그저 희대의 바람둥이 정도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사노바는 단순히 바람둥이로 치부하기에는 적절치 않은 이력을 가진 사람이다. 그가 생전에 가진 직업만 해도 법학박사, 철학자, 사제, 바이올리니스트, 연극배우, 도박꾼, 사업가, 외교관 등 수십 가지가 넘는다.

카사노바는 변화하는 유럽사회에 가장 먼저 눈을 뜬 사람이기도 하다. 타고난 방랑벽으로 각국을 돌아 다닌 그는 누구보다 세상의 변화를 먼저 읽어낸 아웃사이더 였다. 게다가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가 남긴 책 <나의 인생 이야기>에 보면 유독 요리에 관한 언급이 많이 나온다는 사실이다. 감각적인 삶을 살았던 그에게 요리는 세상을 읽는 하나의 코드이기도 하다.
도서출판 해냄에서 출간한 <카사노바의 열정과 함께하는 쾌락의 요리>는 18세기 중반 유럽을 풍미했던 전설적인 로맨티시스트(?) 카사노바의 삶과 ‘사랑’과 ‘요리’라는 두 가지 키워드로 풀어나가고 있다.

카사노바는 바람둥이나 호색가들을 지칭하는 대명사

카사노바는 관능의 쾌락을 심화시키는 것을 자신의 중요한 임무로 삼아 ‘여성을 위해 태어났다고 자각한 나는 언제나 여자를 사랑할 뿐 아니라 그 여성들로부터 사랑받고자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다. 여성들이 호감을 갖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또 자신의 회고록에서 ‘나는 여성을 사랑했다. 그러나 내가 진정 사랑한 것은 자유였다’고 말했다. 자신의 부절제한 행위를 당시 유럽에서 일어난 계몽주의 사상의 근간인 자유로 덮으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카사노바는 분명 수많은 여인의 체취를 탐닉한 감각주의자였지만 그저 단순한 바람둥이는 아니었다.
그의 삶의 색깔은 무척이나 다양했다. 나이 열일곱 살 때 법학 박사학위를 받은 천재였으며, 자유와 평등의 철학을 추구했던 계몽주의자였고, 프랑스 혁명을 앞둔 격변기에 유럽을 누비면서 자유와 평등을 전파한 메신저였다.

또한 40여 권의 저서를 남긴 박식하고 위대한 저술가였으며, 예술과 풍류를 즐긴 낭만주의자였고, 탁월한 벤처 사업가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내가 행한 모든 일들이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자유인으로서, 나의 자유의지에 따라 행동했다’고 고백한 것처럼, 카사노바의 인생 여정을 관통한 것은 자유였다.

문학예술도 수단으로 활용한 문인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 희극배우인 아버지와 구두수선공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맏이로 태어난 카사노바는, 여성을 유혹하는 남성들이 대개 그렇듯이 보통 남성 이상의 탁월한 능력을 몇가지 보유하고 있었다.
그는 화학, 의학, 역사, 철학, 문학에 정통했고, 점성술, 연금술, 마술에도 솜씨를 지녔으며,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히브리어에 능통했고 영어와 스페인어도 조금은 한 것으로 전해진다. 또 무용, 펜싱, 승마, 카드놀이에 빼어난 솜씨를 지닌 데다가 듣고 읽고 말한 것은 물론이고 한번 만난 얼굴도 반드시 기억하는 천재였다고 한다.

이렇듯 카사노바는 다방면에 걸쳐 정통했으나 어떤 직업에도 얽매이지 않은 채 유럽 여러 나라들을 넘나들며 살았다.

신부(神父)수업에서 쫓겨나면서 방랑을 시작한 카사노바는 콘스탄티노플, 파리, 런던 등 유럽의 거의 모든 도시와 나라들을 떠돌면서 주로 ‘여자사냥’과 도박으로 투옥, 추방이 거듭되는 삶을 살았다.
나중에는 베네치아 당국에 온갖 비열한 아부를 하면서 돌아가 스파이 노릇을 해주다가 다시 정권을 비난하는 팸플릿으로 조국을 등진 채 보헤미아에서 최후를 마쳤다.

콘돔을 사용한 최초의 인물 카사노바

세기의 바람둥이 카사노바. 그는 생을 마감하기까지 단 한명의 여자도 임신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그가 완벽한 피임을 실행한 카사노바의 피임법의 비결은 무엇인가?
그 핵심엔 카사노바가 금(金)세공사에게 엄청난 돈을 주고 사들인 황금구슬에 있었다. 카사노바는 이 황금구슬에 유난히 애착을 가졌다고 한다. 이 구슬은 무게가 60g, 직경 18mm로 15년 동안 훌륭하게 제 역할을 다했다. 그는 이 구슬을 ‘상대하는 여성’에게 삽입시켰는데, 구슬이 정액을 밖으로 밀어내 절대로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아 임신을 피할 수 있었다. 카사노바의 친절한 설명에 의하면’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임신을 피하려고 할때 이 구슬을 사랑의 성지 그 밑부분에 밀어넣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한다.

카사노바는 다양한 피임법을 사용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주로 그가 사용한 피임법은 콘돔 사용이었는데, 콘돔을 피임의 목적이 아니라 성병 예방의 차원에서 사용한 최초의 사람이기도 하다.

카사노바는 오늘날의 더치 페서리의 원조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레몬을 반으로 잘라 과즙의 대부분을 짜내 버리고 난 뒤 반구형의 껍질을 경부의 덮개로 사용할 것을 기술하고 있다. 이 레몬껍질의 페서리는 정자를 죽이는 작용을 하기 때문에 훌륭하고 효과적인 피임법이라 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카사노바의 돋보이는 피임법은 콘돔과 황금구슬을 동시에 사용해 효과적인 최대로 높였다는 사실이다. 이렇듯 기발한 아이디어로 132명 이상의 여성들과 관계를 가지며 섹스의 황제로 군림한 카사노바는 죽은 지 200년이 지난 지금도 섹스의 심벌로 남아 있다.

일생 동안 가정을 가지기를 거부했던 떠돌이, 결혼 그 자체를 조롱했던 사나이, 문학예술을 단순한 여성 정복을 위한 수단으로만 활용했던 엉터리 문인. 그러다가 운명처럼 자신의 친딸에게 구혼을 했던 천형의 바람둥이는 회고록에서 ‘예전에 누렸던 즐거움을 회상함으로서 다시 한 번 그 즐거움을 맛보는 한편, 이제는 지나가버린 고통의 기억을 웃음으로 어루만진다’로 하면서 결코 자신의 행위를 참회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그는 루소나 톨스토이에 미치지 못하는 양심불량증 지성인 동시에 역시 최후도 카사노바다웠다고 하겠다.

출처 :
http://www.proudi.com/webzine/200108/feature/feature_1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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